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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레북] 진실을 마주하고 싶다면 _ C.S.Lewis, 우리가 얼굴을 찾을 때까지오레북 2020. 4. 27. 17:30
- 우리가 얼굴을 찾을 때까지
- 국내도서
- 저자 : C. S. 루이스(Clive Staples Lewis) / 강유나역
- 출판 : (주)홍성사 2007.01.18
_최현준 (오늘의 신학공부 팀원)
간혹 그런 순간이 있다. 거울을 보는데 오늘따라 뭔가 다른가 싶은 순간들. 혹여나 본인의 외모가 평소보다 만족스러웠다면 그건 착각이란 추론이 손쉽게 가능하지만, 그런 것보다는 조금 더 세상이 낯설게 보이는 순간들이 있다. 책을 읽거나 과제를 하다가도 갑자기 아는 단어가 새롭게 느껴지는 경험을 하기도 한다. 이런 현상이 왜 일어나는지는 아직 정확히 모른다고 하지만, 이러한 현상은 우리가 익숙해서 보지 못하던 것들을 다시금 직면하게 하기도 한다. 이 책은 그런 이야기다. 뭔가가 비틀려 있는데 어째서인지 못 보던 것들이 보인다.
이야기는 기본적으로 그리스 신화 속 프시케 이야기의 번안이다. 그리고 이 각색된 이야기의 주인공은 프시케가 아니다. 신화에서는 그저 프시케를 질투해서 몹쓸 짓을 한 다른 공주 중 한명인 오루알(실제 신화에서는 이름조차 없는)의 관점에서 바라본 이야기다. 오루알의 신들에 대한 고발과 함께 이야기는 시작한다.
오루알은 추한 외모를 가지고 태어난 왕족의 왕위를 계승할 수 없는 여성이다. 이러한 사실은 그녀를 온갖 시선과 수근거림 속에서 살게 만들었다. 그런 오루알의 평생의 스승이자 친구로 철저한 이성과 과학을 중시하는 여우선생이 있다. 그리스에서 노예로 잡혀온 그는 그리스의 지혜를 가르친다. 그에게는 세상의 모든 원리가 합리적으로 해석된다.
그리고는 배다른 동생 프시케가 있다. 여우 선생과 프시케와 함께 보낸 오루알의 어린 시절은 그녀에게 가장 소중한 기억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왕국에 전염병이 돌게 되고 일련의 과정 속에서 프시케는 왕궁의 신 ‘웅깃’에게 제물로 바쳐지게 된다. 자신에게 가장 큰 행복이 되었던 사람의 암울한 미래 앞에 오루알은 무너져 내린다. 그러나 정작 평온하게 자신이 왕국의 사람들을 위해 무언가 할 수 있다는 사실에 감사하는 프시케에게 더욱 충격을 받는다. 결국 오루알은 프시케가 웅깃의 제물로 바쳐지는 것을 막지 못한다.
그런데 어째선지 프시케는 죽지 않았다. 그리고 프시케의 생존을 확인하고 기뻐하고 있는 오루알에게 프시케가 이상한 이야기를 하기 시작한다. 보이지 않는 궁전을 소개하고 신의 존재를 설명하며 급기야는 자신이 신부임을 강조하며 왕국으로 돌아가지 않겠다는 것이다. 여우선생에게서 배우며 ‘신’이라는 존재에 대하여 문학적인 수사 정도로만 생각하던 오루알에게 이는 너무나도 당황스러운 일이었다. 설령 정말 신이 존재하더라도 모습을 드러내지 않는 것이 신의 추악함 때문일 것이라고 생각한 오루알은, 프시케가 자신과 함께 있어야만 안전하고 행복할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불행히도 오루알은 프시케로 하여금 신의 말을 거역하게 한다. 결국 그로 말미암아 프시케는 굶주림 속에 유배를 당하게 된다.
이야기는 조금 더 이어지지만, 이미 이야기의 핵심은 충분히 드러나고 있다. 저자의 말에서 루이스는 원래 이야기에서는 보이는 신의 궁전을 의도적으로 안 보이는 궁전으로 각색해서 이야기를 만들었다고 했다. 굳이 그렇게 각색한 이유가 궁금했는데, 문득 궁전이 안 보이는 것이야말로 지금의 세상의 모습과 더 닮아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제는 너무 많은 저마다의 사실 속에 진실이 가려진 시대. 궁전이 진실이라면, 우리에게 궁전을 보지 못하게 하는 것은 무엇일까.
작중 눈여겨볼 만한 것들 중 주목하고 싶은 것은 여우선생의 가치관이다. 그는 그리스 신화의 이야기들을 전하며 황급히 덧붙이곤 했다. “그저 시인들의 거짓말일 뿐이지. 시인들의 거짓말이라고, 얘야. 자연법칙에 맞는 이야기가 아니야.” 그는 영의 실재를 인정하지 않는 사람, 합리적인 것을 최고의 가치로 두는 사람이다. 이러한 가치관은 근대 이후부터는 시대의 진리로서의 역할을 자처하고 있는 지도 모르겠다. 현대의 우리는 모두 이성중심적인 사고에 깊숙이 익숙해져 있다. 그러나 이런 오루알과 여우선생의 생각은, 아이러니하게도 유일한 목격자인 프시케의 증언을 믿지 못하게 만드는 결과를 낳았다.
프시케가 설명한 신이 실존하더라도 매우 험악한 괴물일 것이라고 생각한 오루알처럼, 인간의 이성은 언제부턴가 합리적으로 설명해 할 수 없는 것들을 불편해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모든 것을 이성으로 설명할 수 있다는 생각이 전혀 이성적인 생각이 아니라는 사실이 얼마나 큰 비극인가. 바른 이해를 추구하며 태어난 이성이 지금은 어떤 위치에 있는 것인지를 저자는 오루알의 실패를 통해 묻고 있다. 그리고는, 어쩌면 우리가 기억 저편에 묻어 두고 있던 신성(神性)을 말한다.
신화는 이성적 사고가 본격적으로 시작되기 전, 고대의 산물이다. 그렇기 때문에 야만적이고 불합리한 내용들이 가득하다. 그러나 그럼에도 신화는 오히려 현상을 인식한 그대로 설명한다. 고대의 사람들은 거룩하고 두려운 존재를 그들 나름대로 인식했고, 그것을 설명하기 위해 신화의 형식을 발전시켜왔다. 때문에 신화는 언제나 신성에 민감하다. 혹자는 신화를 미개한 것이라고 생각할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신화는 그저 더 큰 존재 앞에 선 모래알 같은 인간을 뼈저리게 인식하고 있는 것이다. 저자는 신화라는 형식과 내용을 같은 지향점을 가지고 구성하여 우리가 이성의 물에 빠져 보지 못하던 거대한 신성을 수면 위로 드러내고 있다.
우리가 놓치지 말아야 할 것은 프시케만이 안정감을 놓치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그리고 마지못해 오루알의 요구를 따를 때에도 확신에 차 있던 것만큼은 변함이 없었다는 것이다. 그녀만이 신성을 똑바로 마주하고 있었다. 프시케는 막연한 두려움도 무시도 아닌 그저 그대로를 받아들였다. 오루알 또한 처음에는 자신의 억울함을 주장하지만, 고발이 진행되는 과정에서 신을 대면하며 대답보다 더 자명한 진실을 마주하게 된다. 저자는 다른 책에서 이런 과정을 이렇게 표현했다. “저는 태양이 떠오른 것을 믿듯 기독교를 믿습니다. 그것을 보기 때문이 아니라 그것에 의해서 다른 모든 것을 보기 때문입니다.” 합리성에 대한 집착 너머에 진리의 편린이 존재한다.
신을 통해 본다는 것이 우리에게는 낯선 일일지도 모른다. 어색한 침묵 속에서 아무것도 이해되지 않는 상황이 반복될 것이다. 그러나 그럼에도 우리가 불편한 진실을 마주하고자 할 때, 이 책은 모두의 낯선 시도를 위한 조금의 위안이 될 수 있을 것이다. 책이 조금 난해하더라도 답답해 할 필요 없다. 신은 원래 합리적이지 않으니까. 책의 마지막에는 오루알의 마무리 되지 못한 고백이 쓰여 있다. “주여, 이제는 당신이 왜 대답지 않으셨는지 압니다. 당신 자신이 대답이십니다. 모든 질문은 당신의 얼굴 앞에서 사라져 버립니다. 다른 무슨 대답을 들은들 만족하겠습니까? 다 말, 말뿐입니다. 다른 말들과 싸우기 위해 끌어내는 말. 오랫동안 저는 당신을 미워했고, 오랫동안 당신을 두려워했습니다. 이제는......” 이 고백의 끝은 좋든 싫든 우리의 고백으로 채워지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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